치타 브리티 (Chitta Vrtti, 마음을 동요시키는 원일들)
파탄잘리의 요가 경은 기쁨과 고통을 만드는 '치타 브리티 Chita vrtti'를 다섯 가지로 분류 열거하고 있다.
1. 프라다나(Pram ana, 표준 혹은 이상 正知)
사물이나 가치를 측정하는 마음 또는 지식으로, 인식과 같은 직접적인 증거(Pratyaksa) 추론(anumana) 권위 있는 사람의 증명이나 언질을 통해 믿을 만하고 또 확실하다고 인정된 지식이나 정보(agama)
2. 비파이라야(Viparyaya 연구 결과 판명된 오류, 倒錯)
잘못된 가정(假定)에 근거한 그릇된 의학 진단, 종전의 천동설과 같은 것이 이 비파리와 야의 예이다.
3. 비 칼파(Vi kalpa, 어떤 사실적인 근거 없는 공상이나 상상, 分別)
마치 거지가 엄청난 돈을 쓰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상상할 때 행복을 느낀다는지 또는 인색한 부자가 자기는 가난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요구라(Indra, 잠)
사유(思維)나 체험이 배제된 상태이다. 사람이 깊이 잠들 때는 자기의 이름, 가족, 지위, 지식과 지혜, 심지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면서 자기 자신을 잊었을 때 그는 상쾌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잠들 때 혼란스러운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5. 스므르티(SMRT, 기억, 체험한 것의 인상을 굳게 갖고 있는 것)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도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슬프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그들을 계속 과거에 얽매이게 하고,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파탄잘리는 번뇌(Klesa)만을 일으키는 '치타 브르티'의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아비기야(arid ya, 무지 또는 ②아 스미다(asmita,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한정시키고, 집단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하는 개인적 차별 감정으로 육체적 정신적 지적 감정적일 수 있다. ③아비니 베 샷(abhimivesa, 삶에 대한 열정과 갈망 즉 세속적인 삶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본능적 집착과 죽음으로 인해 이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만 한다는 두려움).
이런 번뇌(고통)의 원인은 사 타 카(Sadhaka 구도자)의 마음속에 마치 그 몸체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빙산 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 몸체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빙산 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요기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내일에 대한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현재에 오롯이 산다. 바람이 스치면서 호수의 수면을 흔들고, 거기에서 비치는 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처럼, '치타 브르티'는 마음의 평온을 방해한다. 호수의 잔잔한 물은 그 주위의 아름다움을 비춰 준다. 마음이 고요하다면, 자신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서 투영되어 보일 수 있다. 요기는 꾸준한 정진과 욕망에서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 마음을 안정시킨다. 요가의 8단계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치타 백세파 (Chita Viksepa, 혼란스러움과 방해물)
요가 수행자가 요가를 행하는 데 있어서 혼란스러움과 방해를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것에 네 가지가 더 있다.
① 두 칸(duhkha, 고통이나 슬픔) ② 다우로만 수야(daurmansya, 절망) ③앙가메자야트바(angamehayatva, 육체의 불안정) ④사람마다 다름 - 플러스 발사(s vasa-prasvasa, 불안정한 호흡)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장군은 지형과 적군을 세밀히 조사하고 그 대응책을 세우듯, 요기는 수행에 의한 자기 정복의 계획을 세운다.
파탄잘리는 장애 요인을 극복하고, 더없는 행복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선의 것은,
① 마이트립(Maitri, 慈, 조건 없는 사랑) ②카르나(Karuna, 悲, 함께 아파함) ③무디다(Mudita, 喜, 더불어 기뻐함) ④우펙샤(Upeksa)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① 많이 트리(慈)는 단순히 사랑이나 선의라는 뜻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의의 대상이 되는 것과의 일체감(atmiyata)'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과의 일체감으로 그 자식이 성공했을 때 더없는 행복을 느끼는 것과 같다. 파탄잘리는 행복(sukha, 혹은 미덕)을 위해서 많이 트리를 권하고 있다. 요기는 많이 트리(조건 없는 사랑)와 예술미야 타를 증감시킴으로써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적을 친구로 만든다.
② 키루나(悲)는 다른 사람의 불행 duhkha에 연민이나 동정을 나타내고 그 절망감에 눈물을 흘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을 덜기 위한 행위를 수반하는 연민이다. 요기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내장된 힘(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도덕적)을 이용한다. 그는 겁쟁이가 그를 본보기로 용감하게 될 때까지 그의 용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고, 약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든다. 그는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③ 부디 타(喜)는 비록 그가 경쟁자일지라도 그의 '덕행이나 성공(pun-ya)'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마음이다. 부디 타를 통해서, 요기는 그 자신은 달성하지 못한 목표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성냄, 미움, 질투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심한 번민으로부터 자신을 구한다.
④ 우펙샤(捨)는 약 apunya에 빠진 사람에 대한 단순한 경멸, 무관심, 우월감은 아니다. 이는 동일한 유혹에 직면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알게 하는 자기 성찰이다. 또한, 불행한 사람이 빠진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성찰이고 그 후에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한 시도이다. 요기는 먼저 자기 자신 속의 결점을 살핌으로써 타인의 결점들을 이해한다. 이 자기 성찰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과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마이트립, 하루나, 부디 타와우 팩 샷의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의 함축성은 고요한 마음으로만 느껴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고요한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은 파탄잘리가 앞에서 언급한 8단계 중 두 가지, 즉 아사나와 푸라나 야마를 굳은 결심으로 하는 데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둘 중 어느 하나가 활동하거나 활동을 멈추는 것이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탄잘리는 정신적인 평형 상태와 내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프라나야마(호흡법)을 권했다.
시어서 야(Sisya)와 영적 스승(Guru) - 제자와 스승
「시바 상히타(Siva Simhita, 하타 요가의 고전)」에서는 구도자들(sadhakas, 혹은 제자들)을 4계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들은 ① 마르누 (mrdu, 약함) ② 마더냐 마(madhyama, 보통) ③ 아디 마트라(adhima-TRA, 우수) ④ 아디 마트라 타마(adhimatratama, 최상) 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최고 계층인 아디 마트라 타겠다고 만이 이 속세라는 고해를 건널 수 있다.
① 약한 구도자는 열의가 부족하고, 그들의 스승을 비판하고, 욕심 많고, 나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고, 많이 먹고, 여자의 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겁 만혹, 병약하고, 의타심 많고, 말을 함부로 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활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루(스승이나 대가)는 그런 구도자를 만트라 요가 Mantra Yoga의 길로만 인도한다. 큰 노력을 동반함으로써, 구도자 sadhaka는 12년 후에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만트라 mantra라는 말은 사고한다는 의미를 지닌 'man'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만트라는 그 의리를 충분히 이해한 후 계속 반복해 주문을 외우는 기도를 뜻한다. 만트라가 약한 구도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며 그 결과를 가져오기에는 더욱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② 치우침이 없고 침착한 성격의 사람으로서 고난을 참을 줄 알며, 수행을 완전히 이루려는 의지력을 갖고, 온유하게 말하고, 어떤 환경에 처해서도 결제가 가능한 자를 구도자(madhyama)'라 한다. 구르는 이런 특징을 알고, 라야 Lay 요가를 가르쳐 해탈에 이르게 한다(라야 Lay는 헌신, 전념이나 몰아 의미한다.)
③ 안정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라야 요가를 행할 수 있고, 활기차고, 독립적이고, 고귀하고, 자애롭고, 관대하고, 신뢰가 있고, 용감하고, 젊고, 존경할 만하고, 스승을 존중하며, 요가를 행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가진 자를 '우수한 구도자(adhimatra)'라 한다. 그는 6년간의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구르는 이런 사람을 화젯거리여 Hath 요가로 교화한다.
④ 왕성한 혈기와 열의, 잘생긴 외관, 용기 있고, 경전에 능통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건전한 마음가짐, 우울하지 않고,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규칙적인 식사, 감각 기능을 제어할 수 있고, 두려움이 없고, 정결하고, 노련하고, 관용적이고,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고, 확고하고, 지적이고, 독립적이고, 너그러우며, 선한 성격을 지니고, 온유하게 말하고, 그루를 존경하는 자가 바로 '최상의 구도자(adhimatratama)'로 어떤 형태의 요가에도 적당하며, 그는 3년 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시바 상히타」와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기간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파탄잘리는 개인의 영혼과 신성한 우주정신(Divine Universal Soul)이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에 따르면 바이라기와(vairagya, 욕망으로부터 벗어남) 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아부 야사 abhyasa를 중단함이 없는 장기적이고도 헌신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아파 보아야 사에 의해서 영성 계발의 견고한 기초가 만들어진다.
요가 수행은 한정된 시간 내에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졸업장이나 학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요가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장애물, 시련, 고난들은 영적 스승 Guru의 도움으로 상당한 부분까지 제거될 수 있다('GU'라는 음은 어둠을, 'Ru'라는 음은 밟을 의미하고 있다. 어둠을 걷고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이가 바로 영적 스승이다.).
'영적 스승'이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일반적인 지도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는 단순히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영혼의 스승이다. 그는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그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는 자를 시사야 sis ya, 즉 제자라 한다.
영적 스승과 시어서 야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부모와 자식 간, 부부간, 친우 간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구르는 이기적이지 않다. 그는 명예나 이익에 끌리지 않고 궁극적인 목표로 제자를 헌신적으로 인도한다. 그는 신의 길을 보여 주고, 이끌어 줌으로써 제자가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감, 헌신, 교훈, 깊은 이해, 계몽을 불어넣는다. 그는 제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제자가 그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또한 그는 제자가 질문하도록 하고, 질문과 분석을 통해 진리를 터득하게끔 끊임없이 격려한다.
시사야 sis ya는 보다 높은 인식력과 향상이 가능한 소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자신감, 신심, 영적 스승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는 반드시 자신감, 신심, 영적 스승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영적 스승과 시어서 야의 예로는 「카트 우파니샤드」의 의미 야마(Yama, 죽음의 신)와 나히케타Nachiketa,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슈나 Sri Krishna와 아르 쥬나 Arjuna이다. 나 이렇게 타와 아르주나는 통일된 마음, 열의, 알려고 하는 마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씻느냐는 지식을 갈망하고, 겸허한 성품,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영적 스승을 찾아선 안 된다. 그는 쉬라 다(sraddha 가져야 하고, 설사 그가 예상한 시기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망해선 안 된다. 수없이 많은 과거 전생의 경험과 상승 카라(samsara, , 과거의 생각과 행동의 축적된 찌꺼기)로 물들어진 헐떡거리는 마음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단순히 영적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것만 그로 시 그냐가 그 가르침에 몰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드라 Indra와 비로 차나 Virochana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와 악마의 왕자인 비로자나는 절대자에 관해 알고자,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브라마 Brahma를 찾아갔다. 둘 다 그곳에 머물며 영적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인드라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비로자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인드라의 기억 기능은 그가 그의 스승에 대한 사랑과 신심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집중으로서 발전된 것이다. 그가 영적 스승과의 일체감을 가진 것이 바로 그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비결이다. 비로자나의 기억 기능은 단지 그의 지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는 스승에게도, 스승의 가르침에도 몰두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그대로의 모습, 즉 거만한 지식인으로 남아 의심으로 가득 찬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지적 겸손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비로자나는 지적인 자만에 취해서 그가 브라마에게 가르침을 청한 그 자체가 자신을 낮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드라의 접근은 신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비로자나는 매우 실질적이다. 비로자나는 단순한 호기심이 동기가 되었고, 그가 훗날 권력을 장악하기에 유용하다고 믿는 실질적인 지식을 원했다.
씻느냐는 우선 무엇보다도 사랑, 절제, 겸허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사랑은 용기를 낳고, 절제는 풍요를 낳고, 겸허함은 힘을 낳는다. 사랑이 없는 용기는 잔인함일 뿐이며, 절제가 없는 풍요로움은 방종과 부패를 가져온다. 겸허함이 없는 권력은 오만이나 독재를 부른다. 진실한 씻느냐는 영적 스승으로부터 그가 근원적 자아로 돌아갈 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배운다.
사자나(Sadhana, 깨달음을 위한 길잡이)
요가에 관한 모든 지침서는 사다 나(sadhana)나 아부 야사(avhyasa, 쉼 없는 정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사다가는 단지 요가 지침서의 이론적인 연구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노력이다. 참깨로 기름을 짜기 위해서는 압축이 가해져야 한다. 장작이 발화하고 그 주머니에 내재해 있는 불이 댕겨져야 한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구도자는 꾸준한 수행으로 그 자신 안에 깃들여 있는 신성의 불꽃에 불을 붙여야 한다.
"젊은이, 중년, 아주 나이 많은 사람, 심지어 환자 그리고 확고한 의지가 없는 사람도, 꾸준히 수행하는 자의 것이지 수행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요가의 완성, 깨달음은 단순히 이론적인 성전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요기나 은둔자(sanyasi)의 옷을 입는다거나, 요가에 대한 말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꾸준한 수행만이 성공의 비결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우리는 처음 알파벳을 배워 그것을 바탕으로 공부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체득하듯, 첫 단계로 우리의 육체를 철저히 단련시킴으로써 우리는 진리 Tattva Janna, 곧 이 우주 안에 내재해 있는 지고의 영혼과 동이신 데는 인간 본연의 영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내적 평온을 누리고, 신성을 찾으려는 강한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그의 육체, 감각 기능, 마음, 이성, 자아가 함께 어우러져 이루는 집중된 노력에 의해서이다.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최상의 탐험은 그의 조물주에게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의 육체, 감각 기능, 마음, 이성, 자아가 잘 발달하여야만 하고 또 그 기능이 함께 어우러짐이 필요하다. 만약 거기에 노력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이 탐험에서 실패하게 된다.
「카트 우파니샤드」의 1부 3장에서, 야마(Yama, 죽음의 신)는 개인을 마차에다 비유함으로 요가를 구도자 나 힘 캐 타에 설명한다.
"예술만(Atman 마차의 주인으로, 이성은 마부로 고삐로 알아라. 우리가 보통 말하는 감각 기능은 마차를 끄는 말들이며, 그들 욕망의 대상은 목장이다. 감각 기능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될 때, 현자들은 그 자아를 향유자(bhokfr)라고 부른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의 마음을 고삐 잘할 수 없다. 그의 감각 기능은 날뛰는 말들과 같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고, 그의 감각 기능은 길든 말들과 같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늘 산만하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는 절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생에서 저 생으로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하며 방황할 것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주의 깊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절대로 환생하지 않는다. 마음의 고삐를 잘 조절하는 능숙한 마부를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이는 그 여행의 최종 지(즉 영원불멸한 영혼의 궁극 거처)에 도달한다."
"감각 기능들은 욕망의 대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감각 기능들보다 더 강한 것은 마음이고, 마음보다 더 위의 것은 이성이며, 이성 위의 것은 바로 신성이고, 자아로 당신 자신을 교육하고, 욕망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적들을 물리쳐라."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수행만 아니라 포기하는 일까지 필요하다. 포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가 문제시된다. 요기는 세상을 등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를 신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는 모든 영감과 정당한 행위가 신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 그는 신성의 역할을 부인하는 사람들, 악의에 찬 생각을 유포하는 사람들,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을 입으로만 부르짖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요기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신이 나 인류에게 그 행위의 결과를 바침으로써, 그 자신과 그 행위들을 연결한 끈을 끊어 버린다. 그는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만이 그의 특권이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권리도 없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의무를 행해야 할 때는 잠들고, 그들의 요구를 주장할 때만 깨어나지만, 요기는 그의 의무에는 항상 깨어 있고, 권리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가 잠들 때도 수행자와 마음의 평온을 얻은 사람은 빛을 밝히기 위해 깨어있다.